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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원

해외 발령 몇 달 전, 온보딩 차 짧은 출장을 왔었다. 호텔 체크인보다 훨씬 일찍 도착해서 짐을 맡겨두고 임장 겸 동네 한 바퀴를 돌아보려고 했는데 날이 너무 더워 채 삼백여 미터를 못 걸었던 것 같다. 계획 없이 발길 따라 향한 곳이 마치 숨어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것처럼 작지만 울창한 숲이었다. 동네 주민들이라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으레 발을 담그고 쉬는 깨끗하고 얕은 물이 대략 백 평 정도 되는 아주 협소한 공원에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높다란 나무 사이에 간간이 벤치가 있어 인근 편의점에서 샌드위치를 하나 사 먹으며 한가롭게 땀을 식혔다. 사방에 높은 건물이라고는 없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주택가 한복판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나만의 비원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얼마 전 은행 서류를 ..

일상 2026.10.20

이국적이라는 느낌

일상에서 자주 마주치는 것들에서 내가 외국에 있다는 사실을 강하게 일깨워주곤 한다. 아주 작은 것들 예를 들면 베란다 창 새시 잠금장치의 형태라던가, 현관문 자동 잠금장치는 카드키로만 열 수 있다던가 (비밀번호 기능이 없다), 거실 베란다가 그대로 외부로 뚫려있다던지, 변기가 욕조와 분리되어 있고 세면대나 변기는 건식이라는 것도 그렇고. 변기 물통 부분에 별도 수전이 달려있어 물을 내리면 딱 손 한 번 씻어낼 분량의 물이 같이 나오는 것 하며. 스토브에 생선구이용 그릴이 꼭 달려 있는 것도 나는 낯설다. 대부분의 냉장고가 냉동칸을 아래에 두고 있다는 것 또한 이국적이다. 최신 아파트 디폴트 설비라는 24시간 환풍 시스템은 편리하면서도 영 전기가 아깝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도 하고. 보통 한국에서는 주방..

일상 2026.10.20

해외 이주 시 의외로 큰 도움이 되었던 것

특히 종이 문서를 사랑하는 일본이어서 더 그렇겠지만 아무래도 서류 정리할 투명 파일을 여러 개 챙겨 온 거였다. 물론 가장 중요한 부동산 서류는 중개인이 따로 봉투에 잘 합철해 준다. 그 이외에 자잘한 게 정말 많다. 시청 우체국 은행 보험 통신 관리사무소 보안 수도 전기 가스 등등 각종 서류 러시가 이어진다. 청구서만 있는 게 아니다. 온라인으로 이 모든 행정을 이관하도록 안내하는 우편물도 연거푸 온다. 가끔 동봉된 봉투로 회송도 해야 하니 집 근처 우체통이 어디 있는지 봐두면 좋다. 뿐만 아니라 가전, 가구 같은 대형 배송 서비스도 서류 릴레이가 이어진다. 설치 완료 확인서도 준다.

일상 2026.10.20

시작이 좋다

별 고민도 준비도 없이 덜컥 시작한 해외살이 첫 주는 행운으로 가득했다. 무엇보다 날씨가 내 편이었다. 국가 재난이 선포될만큼 전례없이 한 달 넘게 이어지던 비가 내 입사일을 기준으로 똑 그쳤다. 한국은 급속도로 추워지는 시기인데 반해 여기는 아직 낮에는 28도까지 올라가는 한편 가을답게 제법 선선한 바람도 분다. 사계절 중 가장 좋아하는 가을 분위기가 한국보다 오래 지속되는 느낌이다.두 번째 행운은 입주 일정이었다. 입주일 전후를 기점으로 마침 가족들 휴가 일정이 겹쳤고, 호텔 같은 임시숙소를 회사에서 지원해주는 동안 겸사겸사 가족 휴가를 즐길 수 있었다. 물론 초과되는 인원에 대한 과금은 개인 부담이지만 사비라면 한참 망설였을 4성급 호텔에서 비수기에 호캉스를 즐길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입주 당일..

일상 2026.10.11

길모어 걸스가 넷플릭스에서 내려갔다

지난 6월 말을 기점으로 라이선스 만료됐다고 한다. 어언 넷플릭스 구독 5년 차. 순전히 길모어 걸스를 보기 위한 지출이었다. 소문을 듣자 하니 리바이벌 시리즈인 한 해의 스케치도 올해 안에 빠진다더라. 올해 들어 프렌즈나 오피스 같은 전설적인 시트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넷플릭스 충성도가 한껏 올라갔거늘. 유튜브에 길모어 걸스 하이라이트 클립이 꽤 많이 있으니 그걸로나마 허전한 마음을 달래야겠다.

후기 2026.09.22

끼리끼리

기어이 편치 못한 관계로 남은 이들이 자꾸만 떠올라 마음을 갉아먹는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아쉬워할 것 없다. 나와 안 맞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어딘가 나 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불편하게 하는 자기들만의 좁은 관계망에 만족하고 심지어 배타적인 사람들이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다. 내 잘못이 아니다. 이제 살면서 다시는 접점도 없을 사람들이다. 내 인생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깨끗이 흘려보내자.어제 마지막 출근을 하고 온 회사를 한 바퀴 돌며 인사를 했다. 더러는 내가 찾아가지 않아도 부러 와서 길게 아쉬움을 전하는 반가운 이들도 있다. 반대 경우도 물론 있다. 그동안 서로에게 느꼈던 친밀감과 정확히 비례하는 인사 시간이 재밌다.역시나 친한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모일 뿐 전혀 그 밖의 교류는 없는 무의..

회사 2026.09.18

마음의 빗장

끝내 마음의 벽을 허물지 못하고 어색하게 지내는 무리가 있다. 하필이면 내가 속한 팀에서 그렇다. 이게 누구 탓인지 치졸하게 계산하길 반복한다. 그렇다고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한편으론 폐업 수순을 밟는 회사의 전형적인 악영향이라고도 생각한다. 없어질 회사, 곧 떠날 회사에서 그렇게까지 노력했어야 할까? 그런 호인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래도, 내가 조금 더 마음을 열었으면 어땠을까? 나도 그들도 조금이라도 편히 지내는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을까? 부질없는 자책을 휘두른다.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나는 타인에게 진실로 관심이 없다. 천성대로 지낸 것 뿐이다. 나는 언제 어디에서건 외톨이였다. 내가 먼저 마음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초래한 외로움에 적어도 남 탓은 하지 말아야지. 아..

회사 2026.09.18

우연이겠지

일본 월세집을 알아보던 중 일본 소형 아파트만의 전형적인 주방구조를 접하게 되었다. 한국에선 생소한 동선이라 이리저리 살펴보던 중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예전에 가끔 상상하던 내 다음 집 구조랑 똑 닮아 있었다. 어차피 요리는 안 할 거라 주방 인테리어를 찾아본 적도 없건만 어쩌다 불현듯 상상하는 미래의 집들이 풍경은 뜬금없이 거실을 마주 보는 주방 구조였다. 그런 집에 살아본 적도 없는데 희한한 일이다.

일상 2026.09.13

작은 행운들

사실 아직 회사에서 하루하루가 편치 않다. 하지만 좋은 일들은 도처에 있다. 매일 작은 행운이 하나씩은 생긴다. 만기 한참 전에 퇴거하는데도 집주인이 흔쾌히 협조해 준다거나 매물 내놓은 당일 바로 계약이 됐다거나 폐기하려던 매트리스를 선뜻 가져가려는 사람이 나타났다거나 출국 직전까지 저렴한 차를 빌릴 수 있게 되었다거나.회사에서도 그동안 불편했던 동료들 외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단순 친목을 넘어서 커리어 확장에 적극 도움을 주는 시니어들과 가까워졌다. 실제로 도움을 준 분들도 있고 앞으로 언제든 같이 일하자며 거듭 기약하는 분들도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좋은 리더가 아닌데 내 윗 연차 사람들에게는 유독 이쁨 받는 게 긍정적인 상황인지도 잘 모르겠다. 한편 온보딩하는..

일상 2026.08.29

증명사진

비자 사진을 찍는 김에 증명사진도 갱신했다. 사원증에 사용할 요량으로 보정을 많이 하지 않았다. 삼십 후반의 나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이지만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그냥 나 자신 그대로의 상태라 맘에 든다.별 생각 없이 입은 흑백 상의가 이제 보니 왠지 상복 같다. 혹시라도 근시일 내에 죽게 된다면 가족들이 영정사진 마련하는데 어려움을 겪진 않겠다며 안심한다.

일상 2026.08.02

일본을 가게 됐다.

연수나 파견 같은 게 아니라 영구직으로. 두어 달 뒤면 출국이다. 일본어 아니 일본 문화라고는 근처에도 가본 적 없는데 그렇게 됐다. 한국에선 마땅히 이직할 데가 없는 직종인 게 문제다. 지금 회사에서 매일매일이 괴롭다. 도망치듯 떠난 사람이 어디에서건 행복할리가. 이렇게 떠밀리듯 사는 것도 지겹다.마침 일본 열도에 지진이 잦아지고 있다. 강진을 고대하는 이 마음은 무엇일까. 돌려 말할 것 없다. 나는 죽으러 간다. 죽을 용기가 없어서 나를 죽여줄 곳을 찾아간다.

회사 2026.07.13